logo

홈

게시글

시간표

메모

홈홈 active

홈

게시글게시글 active

게시글

시간표시간표 active

시간표

메모메모 active

메모

hanilians © 2024-2025 jonghyunlee with ❤️

개인정보 처리방침
서비스 상태
오픈소스 라이선스

한일리안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한일고등학교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것으로, 한일고등학교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Build 4645145 Rendered at 2025. 05. 24. 09:07:27

게시글

  • 미안합니다 생활화 캠페인미캠 팀에서 준비한 "미안합니다 생활화 캠페인" 에 대한 카드뉴스를 읽어 보세요! Avatar

    2025년 5월 15일 · 미캠

  • 2025 학생참여예산제 안내안녕하세요, 한일리안입니다. 2025 학생참여예산 신청 안내드립니다. 학생참여예산제란? 학생참여예산제는 학교회계예산 중 인건비, 목적사업비 등 경직성 경비를 제외한 학교 자율 예산에 학생, 학부모, 지역주민, 학교운영위원 등 교육수요자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예산 편성시 반영하는 제도입니다. 한일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면 누구나 제안 및 신청이 가능합니다! 신청 기간 및 방법 신청 기간 2025년 4월 17일(목) 까지 *일정에 변동이 있을 수 있음 신청 방법 3-5 이종현을 찾아와 의견서 수령, 검은 볼펜 수필로 작성하여 신청 기간 내 제출 재학생 의견 수렴 예시 ✔️ 학생 아이디어 공모 실시 ◦ 운영예시: 양심 우산, 알뜰바자회 행사 지원, 복도 벽화 꾸미기, 청결 캠페인 손세정제 구입, 다 같이 지키다 독도사업(배지구입) 등 ✔️ 수업과 연계한 프로젝트 진행 ◦ 운영예시: 「한일 문제 우리가 해결해요!」(사회 수업과 연계한 역사 탐방), (사회 수업과 연계한 지자체 현장체험학습) 등 ✔️ 학교 주요 행사 활용 ◦ 운영예시: 「과학 체험의 날」 자치회에서 운영하는 체험 부스 지원, 「학년별 체육대회」 자치회의 놀이마당 운영 지원 등 감사합니다. Avatar

    2025년 4월 9일 · 이종현

  • 제 37대 대외협력부 감사사업 - 제 1학기 1회 감사감사서 제 37대 대외협력부 감사사업 - 제 1학기 1회 감사 대외협력부 부장 나유진 서문 본 감사는 제 37대 학생자치정부의 출범 이전부터 치밀히 구상되고 철두철미하게 준비된, 전례 없이 엄중한 심판의 장(場)이다. 이 감사의 목적은 하나이며, 그 목적은 거룩하리만치 확고하다. 학생자치정부가 공정함과 청렴함을 바탕으로 정의를 실현하며, 모든 학생에게 무결하게 봉사하는 진정한 권위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이번 감사는 오랜 숙의와 진중한 결의의 산물이다. 과거의 폐단을 도려내지 않는다면 미래 또한 어둠에 잠식될 것이며, 부정과 기만은 학생자치정부의 이름 아래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이에 우리는 모든 부서의 실책과 태만을 철저히 밝히고, 그 잘못을 고하고자 한다. 불의의 종식을 선언하며, 정의의 칼날을 들이댐으로써 학생자치정부의 기강을 바로 세울 것이다. 감사 대상 본 감사의 대상은 체육부와 생활안전부의 차장 2인(조재윤, 정관호)으로 명백히 규정한다. 이들 부서는 2025년 중 실질적 사업을 감행한 몇 안 되는 부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성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철저한 검증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그 외의 부서들은 금번 감사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니, 이는 이들이 마땅히 수행하여야 할 사업조차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2회 감사에서는 이들 또한 냉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만, 언론행정부(최동명 차장)와 학년장(최기호, 박재현)은 그 사명과 의무를 완벽히 수행하였음이 명백히 입증되었으므로, 이번 감사의 대상으로 삼지 아니하였다. 이들은 학생자치정부의 이상을 실현하며, 타 부서의 귀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체육부 감사내용 체육부는 호실 대항 축구 리그를 주된 사업으로 하여 체육대회를 주관하는 부서로서, 학생들의 신체 단련과 연대감을 고취함을 그 사명으로 삼아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체육부는 체육대회, 호실 대항 축구 리그 그리고 현제관 체육대회 진행 사업은 착실히 수행하였으나 그 외 사업에서는 책임을 방기하고, 주어진 의무를 감히 도외시하였다. 검토된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한일 명예의 전당 운동장 예약표 - 심판 신청 서비스 조사 결과, 피감사인(조재윤 차장)은 심판 배정 시스템에 대한 모든 지식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한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관한 사업 또한 전혀 전달받은 바 없다고 진술하였다. 2024년 8월에는 예산이 다량 소요되지 않으며 모든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이라 발표하였으나, 2025년 4월에 이르러서도 피감사인(조재윤 차장)은 이 사업들에 대해 처음 듣는다는 기막힌 답변을 내놓았다. 이는 명백히 직무를 방기한 죄악이며, 거짓된 약속을 남발하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은 파렴치함에 다름 아니다. 체육부의 불성실함과 기만적인 행위는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자료 - 체육부 월례회의 자료, 기호 2번 공약문서 생활안전부 감사내용 생활안전부는 전교생의 안전을 수호하고, 나아가 학생들의 생명을 지키는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은 부서이다. 그 책임의 무게는 실로 대단하며, 결코 경시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생활안전부는 그 책임을 저버리고 말았다. 제출된 기호 2번의 공약문서, 1년간의 월례회의 자료, 학생자치정부 회의록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생활안전부는 매번 동일한 자료와 내용을 되풀이하며 무위(無爲)로 일관하였다. 특히, 빗물 고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패드는 오히려 빗물에 잠겨 무용지물로 전락하였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미끄러져 뇌진탕, 척추 골절, 고관절 파열 등의 심각한 부상을 입을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또한, 화장실 보호 필름 설치 사업은 은퇴를 몇 개월 안 남기신 선생님께 1회 건의만 했을 뿐 아무런 추진을 하지 않아 그 이후의 학생들의 사생활이 심각히 침해받고 있다. 1년 동안 거짓된 보고와 미진한 행정 처리가 지속되었으며, 그 안일함과 무책임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생활안전부는 더 이상 그 명칭을 유지할 자격이 없으며, 그 역할과 책임은 이미 상실되었다. 질서유지부로 개명하고, 안전 업무는 보다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부서로 이관하는 것이 마땅하다. 참고자료 - 생활안전부 1년간의 월례회의 자료, 기호 2번 공약문서, 학생자치정부 회의록 결론 체육부와 생활안전부의 부실함은 실로 경악할 만한 수준이며, 그 기만적 행태는 여지없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피감사인(조재윤, 정관호)은 4월 말까지 모든 사업을 완수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하고 가혹한 심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어떠한 변명도, 어떠한 사정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 대외협력부 일동은 심판을 단행하며, 정의의 기치(旗幟) 아래 모든 부정과 불의를 단죄할 것이다. 이번 감사서가 학생자치정부의 진정한 개혁과 부흥을 위한 불변의 지침이 되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정의를 구현할 것이며, 그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방해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대외협력부 부장 나유진은 이 자리에서 명확히 천명한다. 차장 유준상, 대외협력부 부원 일동과 한일고등학교 380명 학생들과 굳건히 연대하여, 정의의 칼날을 추호의 망설임 없이 휘두를 것이다. 그 칼날은 기만과 부정을 가차 없이 도려낼 것이며, 그 누구도 그 준엄한 심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보고서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이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최후의 선언이며, 부정과 태만을 절멸시키기 위한 명백한 선전포고이다. 부장 나유진 Avatar

    2025년 4월 9일 · 나유진

  • 한일리안 개발하실 분 구합니다.안녕하세요. 개발자가 고3 수능 준비를 해야함에 따라 지속적인 기능 개발 및 유지보수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38/9기 학생 중 희망자에게 한일리안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모집 인원 n명 지원 연락처 구글챗 20231119@hanilgo.cnehs.kr 지원 양식 - 학번/이름 - 본인 GitHub 프로필 주소 - 지원 동기 - 짧은 어필 이런 기술을 사용해요 - Typescript - React | Next.js 15 (App Router) - tailwindcss - Supabase as Backend, Sanity as CMS 이런 경험을 하실 수 있어요 - 최신 기술 스택을 이용해 최고의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는 사이트 만들기 - MAU (Monthly Active User) 400명 가량의 규모 있는 웹 서비스 운영 및 유지보수 - 개발자들 간의 기술적 소통 및 코드리뷰 - 개발뿐만 아닌 다양한 분야에서의 기여 -> 특히 생기부에 쓰시면 유관학과 지망 학생분들께는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개발 좋아하는 친구는 저랑 재밌게 놀 수 있을 듯 싶네요. ​이런 분을 원해요 - 나랑 말이 잘 통하는 학생 - 매사 결정에 대해 적극적인 학생 - 뚜렷한 목표의식과 행동력 - 개발에 국한되지 않은 재능을 보유한 학생 ​이런 분이면 더 좋아요 - 상기된 기술 스택을 이용하여 웹 개발 경험이 있는 학생 - 웹 개발뿐만 아닌 python, java 등 프로그래밍 언어를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학생 - UI와 UX에 관심이 많은 학생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지원을 기다립니다. Avatar

    2025년 3월 22일 · 이종현

  • 한일리안 03월 시즌2 패치노트안녕하세요, 한일리안입니다. 03월에 진행될 사용성 개선 패치 내역을 안내드립니다. 개발자가 나태해서 미안합니다. 해당 패치는 3모 이전까지 최종 적용될 예정입니다. 😭 1. 메인 UI 리뉴얼 더 깔끔하고 쓰기 편한 UI가 되었어요 ❤️ 절제된 멋과 역동적인 애니메이션을 이용해 새롭게 디자인된 한일리안이 여러분들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넓은 너비의 화면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이드바 디자인과 함께 전반적인 UI를 새롭게 뜯어고쳤어요. 다크 모드 지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밝은 화면이 두려운 어둠의 한일인들을 위한 다크 모드가 드디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상단 로그인 버튼 옆에 있는 아이콘을 클릭하셔서 화면 모드를 전환하실 수 있어요. 더욱 직관적인 오늘의 급식 오늘의 급식 뿐만 아니라 일주일 뒤 급식까지도 볼 수 있다고?! 급식을 더욱 편하게 확인해보세요. 날짜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나오는 달력에서, 내가 원하는 날짜를 선택하면 그 날짜의 급식을 보여드려요. 급식표 찾아 떠나는 불편한 일은 이제 안녕~ 홈에서도 확인하는 시간표 홈 화면 위젯으로 시간표가 들어왔어요. 이제 시간표 페이지를 찾아갈 필요 없이 바로 스크롤만 내리면 시간표를 확인할 수 있답니다! 새롭게 변경된 시간표 (뭐가 바뀌었는지는 아래에서 설명드릴게요)와 함께 더욱 편리한 학교생활을 즐겨보세요. 2. Text 대신 메모 쓰세요 계륵같았던 메모 페이지가 완전히 새로워졌어요! 이제 크롬북의 Text 앱보다 더욱 편리하게 메모하실 수 있게 되었어요. ✨ 다양한 텍스트 스타일 글씨 크기, 인용문, 체크리스트... 다양한 스타일을 툴바에서 선택하여 바로 적용할 수 있어요. 이미지, 웹사이트 링크 첨부 이미지와 웹사이트 링크 첨부를 통해 더욱 내 입맛에 맞는 메모를 작성할 수 있어요. 이미지는 암호화된 상태로 로컬에 저장되기 때문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확인할 수 없어요. 자동 저장 내가 쓰던 메모 내용은 매 초마다 자동으로 저장되어, 순간 웹사이트를 나가거나 크롬북 전원이 꺼져도 메모 내용은 안전하게 보관돼요. 아찔한 순간은 이제 안녕~ 3. 나만의 시간표 기존에 있던 시간표 기능을 더욱 강화시켰어요. 이제 다양한 학년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내 선택과목에 맞춘 진정한 나만의 시간표도 볼 수 있고, 시간표를 이미지로 다운받을 수도 있답니다! 🏃‍♂️ 선택과목 선택 이제 학년, 반 선택을 하고 나면 선택과목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데요, (1학년은 제외) 내가 수강하는 선택과목을 선택하고 설정을 완료하면 초록색으로 나의 선택과목이 시간표에 하이라이트되어 나타나요. 내가 무슨 수업을 듣는지 헷갈릴 때가 참 많은데요, 앞으로는 한일리안이 도와드릴게요! 다음 업데이트에는 선택강의 수강 장소도 확인할 수 있게 업데이트할 예정이랍니다. 이미지 다운로드 시간표 페이지 상단의 다운로드 버튼을 누르면, 바로 시간표를 이미지로 저장할 수 있어요. 바탕화면으로 설정하거나, 인터넷 연결이 끊겼을 때 이미지로도 확인하실 수 있답니다 😝 4. 게시글 뷰어 업데이트 목차, 글 더보기 본문 옆에 사이드바로 이 글의 목차, 그리고 작성자의 최근 글 3개가 보이게 변경됐어요. 목차로 시간도 아낄 수 있고, 최근 글들도 심심할 때 읽어보면 재밌을거에요! Avatar

    2025년 3월 17일 · 이종현

  • 우유곽은 접어서 버려주세요테스트 게시글입니다. 우유가 바닥에 다 샙니다. 우유곽을 접어서 버립시다. Avatar

    2025년 3월 15일 · 이종현

  • 학생참여예산 사업 공지안녕하세요. 기획재정부 차장 최덕상입니다. 기획재정부에서 한일고에서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학교에 직접 건의할 수 있는 학생참여예산 사업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추가로 필요한 것 이외에도 불편해서 학교에 건의하고 싶은 사항을 적으셔도 괜찮습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IBHy-2-uC80J2eIML23YKoRaVgAJB3jOZB7fOzSyKu7ufsA/viewform?usp=header 위 링크를 통해 참여해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Avatar

    2025년 3월 10일 · 최덕상

  • 한일리안 12월 14일 패치노트안녕하세요, 한일리안입니다. 12월 14일에 진행된 사용성 개선 패치 내역을 안내드립니다. 1. 읽기 편한 게시글 공지사항 페이지와, 학생들이 참여해 글을 작성하는 아티클 페이지는 동일한 PostView를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한일인이 게시글을 읽으려고 할 때 글 가독성이 매우(...) 안 좋았다는 걸 인지하고 다양한 부분에서 가독성과 편의성을 개선했어요. 먼저 Before와 After를 확인해 보실까요? 동일한 게시글이고, 글 자체에 수정은 없었답니다. 살짝 보셔도 훨씬 읽기 편해진 것이 눈에 보이실 것 같아요. 이제 어떤 부분이 바꼈는지 톺아볼까요? 자간, 줄 높이 개선 가독성이 떨어졌던 원인인 자간과 줄 높이를 조정하여 읽기 편하게 만들었어요. 특히 모바일 환경에서 훨씬 체감이 잘 되실 것 같습니다. 2. Quote 블럭 추가 Quote 블럭을 추가해 특별하게 강조하고 싶은 텍스트를 강조할 수 있어요. 3. 링크 표시 방식 변경 그냥 일반 텍스트처럼 보이던 링크를 강조되어 보이는 칩 형태로 변경했어요. 이제 못 보고 넘어가는 일 없이 링크를 찾을 수 있답니다! Kakera by CLTH 방학이 시작된 만큼 기존 37, 38기와 내년에 들어올 39기를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 즐거운 방학 보내세요! 한일리안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Avatar

    2024년 12월 14일 · 이종현

  • 북한과 대한민국의 다양한 분야 비교군사, 기술 2525 황동규 1. 남북한의 군사 6.25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남북한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며 긴장 상태를 이어갔다. 남한과 북한 모두 산업화를 거치면서 철강 산업이나 군수품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에따라 군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제작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들였다. 뿐만 아니라 두 국가는 강대국들로 부터 여러 무기를 사들여서 군사력을 증진하였다. 1980년대 북한정권은 한국에 대해 끈질긴 군사적 위협을 자행했다. 미얀마에서 고위관리들을 살상한 아웅산 테러(1983년), KAL기 폭파(1987년) 등 테러전술을 감행했다. 1990년대 북한정권은 공격적인 전략을 유지하면서 주요전투부대의 전투력을 대폭 확대 개편하고정밀유도 무기를 대거 도입하였으며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였다. 비대칭 위협의 결정판인핵개발 의도를 드러내며 정치적·군사적 이점들을 챙기려고 했다. 한편 북한 정권은 계획경제의 실패로 곤경에 허덕이면서도 공격 지향적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힘을쏟았다. 또한 1990년대 초 북한의 강력한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의 붕괴로 북한은 비대칭 위협을 더욱 강화했고, NPT를 탈퇴(1992년)했으며, 동해안 잠수함 침투(1994년) 등지속적인 도발을 감행하며 불안을 야기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이후에는 정권장악을 위한 선군정치(군사력 강화를 최우선 목표로 하는 정치)를 더욱 내세웠다. 1990년대 탈냉전기를 맞이해 한국이 유엔 회원국이 되고 중국 및 러시아와 수교 등 전략환경이 크게 바뀌자 1994년 3월 국방목표를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의 안정과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로 개정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북한은 김정일 사후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도 김정일의 선군정치노선을 변경하지 않고 지속하며, 핵·경제 병진 노선을 추구하였다. 북한은 핵과 탄도미사일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개발, 재래식 전력 증강, 접적지역 무력도발, 사이버공격과 소형무인기 침투 등 지속적인 도발을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정과 세계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남한은 국제질서에서 대한민국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안보 차원에서의 적극적 참여를 추진했다. 또한 고조되는 북한의 군사 위협에 맞서서 다양한 군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2. 남한의 개발중인 주요 군사 무기와 기술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KAMD) ​ 한국형 3축체계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된 방어체계로 ‘킬체인(Kill Chain)’, ‘한국형 미사일 방어(KAMD)’, ‘대량응징보복(KMPR)’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킬체인은 발사 전 선제타격을 담당하는 체계이고, KMPR은 주요 전략 표적을 초토화하는 체계라면 KAMD는 ‘다층 복합 방어 체계’이다. 다층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KAMD는 다양한 방어 체계를 구성하고 있으며, 적의 미사일 요격 고도에 따라 방어 전략이 나뉘어져 있다. L-SAM(Long-range Surface-to-Air Missile)은 대한민국에서 개발한 장거리 지대공 무기로, KAMD의 상층방어 체계이다. L-SAM은 고도 40~70km의 미사일들을 요격하거나 항공기를 장거리에서 격추한다. 이는 KAMD에서 핵심적인 장비로, 한국형 사드(THAAD)로도 불리고 있다. 통상적으로 탄도미사일은 발사 후 상승 단계, 외기권에서 고공비행하는 중간단계, 고도 100㎞ 이하의 대기권으로 재진입하고 목표를 향해 하강하는 종말단계를 거친다. 종말단계 중에서도 통상 고도 40㎞를 기준으로 상층과 하층을 구분한다. 현재 배치된 미국산 패트리엇(PAC-3)과 국산 천궁-Ⅱ(M-SAM-Ⅱ)는 종말단계 하층에서 탄도미사일을 방어하는 무기다. 경북 성주에 배치된 사드(THAAD)는 종말단계의 상층을 막는 체계인데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미군 자산으로 L-SAM보다 요격 고도가 높다. L-SAM은 패트리엇·천궁-Ⅱ보다 높은 고도에서 탄도미사일을 요격해 우리 군의 미사일 방어 범위를 확장하는 전력이다. 즉 미사일 방어를 2개 층에 걸쳐 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L-SAM이 상층에서 먼저 요격에 나서고 만약 실패할 경우 하층에서 천궁-Ⅱ로 한 번 더 요격을 시도하는 개념이다. L-SAM은 운동에너지를 이용해 적 미사일을 직접 타격하는 직격요격(힛투킬·hit to kill) 방식을 채택했다. 목표물 주변에서 폭발해 퍼지는 파편을 통한 요격인 폭발파편 방식보다 정확도와 파괴력이 뛰어나고, 기술적 난도가 높다. 직격요격을 위해서는 그만큼 정밀한 유도가 필요한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위치 자세 제어장치(DACS), 표적의 미세한 열원을 감지·추적하는 적외선 영상탐색기(IIR)도 국내 기술로 구현됐다.IIR의 시야를 확보하고 요격 직전 신속하게 분리되는 전방 덮개, 요격 순간 운동에너지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직격요격 효과를 극대화하는 이중 펄스형 추진기관 등도 L-SAM 개발에 따른 성과이다. KF-21 보라매 우리나라는 1990년대 말 불어닥친 IMF 경제 위기를 거치며 항공산업은 구조조정을 거쳤고, 그 결과 1999년 삼성항공, 대우중공업, 현대중공업이 통합하여 단일항공법인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탄생하였다. KAI는 창립이후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 왔지만, 최근 큰 화제를 불러모은 것은 다름아닌 KF-21일 것이다. KF-21은 대한민국에서 개발한 초음속 전투기로 대한민국 공군과 인도네시아 공군이 도입할 예정인 4.5세대 전투기로 자체 전투기 개발 능력 확보 및 현재 활동중인 F-4 팬텀 II와 F-5 프리덤파이터 등의 노후 전투기 대체 수요로 추진중인 대한민국 공군의 중형급 전투기 개발 사업 KF-X의 결과물이다. 지난 2022년 7월 19일 초도비행의 성공하였고, 2023년 6월 28일 시제 6호기의 비행 성공을 끝으로, 사전에 계획되었던 KF-21의 시제기 6대가 모두 비행에 성공하였다. KF-21의 개발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업 초기에는 국방부 산하 정책기관인 한국국방연구원(KIDA)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각각 2003년과 2007년에 사업 타당성이 없다는 연구 용역 결과를 내놨다. 이후 2009년 방위사업청이 건국대에 의뢰한 사업 타당성 분석에선 ‘경제적 타당성을 가졌다’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와 불씨를 살렸고, 2010년 예산 441억원이 반영되면서 2011~2012년 탐색개발이 진행되었고, 이어 2013년 11월 합동참모회의에서 작전요구성능(ROC)과 전력화 시기, 소요량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추진 방향이 결정된 후에는 외부로부터 첨단기술 확보에서 난관에 부닥쳤다. 2015년 4월 미국은 KF-21 개발에 필요한 능동 전자주사식 위상배열(AESA) 레이더, 적외선 탐색·추적 장비(IRST), 전자광학 표적 획득·추적장비(EO TGP), 전자파 방해장비(RF 재머) 등 4개 핵심 장비의 기술이전 불가 방침을 우리 쪽에 통보했다. 결국 이들 4개의 핵심 장비의 체계 통합과 관련된 기술을 국내 개발로 선회하였고, 그 결과 AESA 레이더와 IRST는 국내 기술로 개발하여 한화 시스템의 시제품이 탑재되었고, RF 재머를 포함한 통합 전자전 체계(EW Suite)는 LIG 넥스원이 시제품을 납품하는 등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핵심 기술들을 개발하였고 지금도 개발 진행중이다. 2516 이정민 북핵은 미래에 어떻게 처리하고 통일 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재 북한은 2024년 1월 기준 약 50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2023년 대비 약 20기가 증가하면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 중에서는 많이 보유한 것은 아니지만 핵무기는 1기만 있어도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하기에 만일의 상황을 위해서라도 북핵의 위협을 감소시키고 북핵을 제거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 이것을 이행 할 수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핵무기 보유 인정 국가는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 총 5개 국가만 있습니다. 이 외 핵무기 보유국들은 NPT(핵확산방지조약)에 가입되어있지 않으며 핵실험을 공식적이지 않으며 국제 사회 인정을 못받는 나라입니다. 북한은 현재 핵 보유 인정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유는 위 3개의 항목에 다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북한은 2006년 1차 핵실험을 시행 후 6차 핵실험 까지 했으며 조만간 7차 핵실험을 할 것이라는 전문가 예측이 있을 정도로 국민의 생활을 무시하며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한 핵실험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북한 국민뿐만 아니라 전세인의 안보에도 위협을 주는 북한의 핵실험을 억제 또는 핵탄두 제거 등을 해야합니다. 따라서 전세계는 힘을 합쳐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고, 궁극적으로는 핵무기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군사적 억제 입니다. EDSCG(한미 확장억제전력협의체)는 북한의 핵무기 사용을 억제하는 기구 입니다. 이 기구는 북핵 으로부터 가장 위험한 한국과 패권국가인 미국의 고위급 협의로 이뤄지며 F35a 5세대 전투기 연합훈련, 로널드 레이건 항모 강습등의 훈련을 하며 우주, 사이버 영역 공조도 하며 북한의 핵 발사를 억제하고 있습니다. KMDS(한국형 미사일 방어 체계)는 대한민국이 자체적으로 미사일을 개발하여 북한의 핵으로 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무기로는 현무-5, 천궁ll, 천마가 있습니다. 덕분에 전세계에게 수출할 정도로 대한민국 방산 산업은 크게 발달하였고 폴란드의 ‘오르카 프로젝트' 의 주 협력체로 선정될 정도로 전세계 국가에 인정받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외교적 억제 입니다. 군사적 억제는 미국과 대한민국 이 두 국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외교적 억제는 대부분의 나라가 참여하여 이뤄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외교적 억제로는 대북제재 라고도 불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줄여서 안보리 제재)가 있습니다. 유엔에 가입되어있는 나라들이 금융 및 경제를 활동해서는 안되며 간단히 말하여 외하벌이를 못하게 막는 것 입니다. 많은 나라들은 이에 동의하고 지키고 있지만 강한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중국, 러시아는 북한에게 꾸준히 물자 원조, 미사일 원조를 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나라가 북한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아 북한은 현재 고립되어 중국, 러시아 원조 없이는 유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최빈국이 되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제 1차 핵실험 후 안보리 제재 1718호가 발의됐으며 핵실험을 할때마다 대북제재가 추가 되고 있습니다. 2016년전 까지는 대량 살상무기 직접 거래를 제재하였지만 2016년 4차 핵실험 이후로 2270호가 발령되었으며 2270호의 보충, 강화를 위해 2321호,2371호,2375호,2397호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북한과의 거래를 직,간접적으로 금지하며 북한이 핵실험 자금을 얻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들이 발의되고 다음해인 2019년 북한의 총 수출액은 90%감소하며 수입액은 30% 감소한 걸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대북제재가 엄청나게 효과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북한에게 제재를 가하고 있으며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한 이보다 더한 제재들이 나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SLBM,ICBM, 전술핵 현재 북한이 만들고있는 핵무기는 크케 SLBM,ICBM, 전술핵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ICBM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로 이전 비행기 미국 본토에 핵을 발사하기 위해 북한이 만들고 있으며 가장 주력으로 만들고 있는 미사일입니다. 작동방식으로는 우주발사체와 동일한 원리를 이용하여 대기권을 뚫고 우주 공간으로 나갔다가 다시 대기권에 재돌입, 목표로 도달하는 것입니다. ICBM 작동 방식은 1단계 부스터 작동 (A)->발사 후 약 60초 후 1단계가 떨어지며 2단계 부스터 작동 (B). 재돌입체 보호용 페어링 분리 (E)->발사 후 약 120초 후 3단계 부스터 작동(C) 후 2단계 분리 발사 후 약 180초 후 3단계 부스터 작동 중지후 탄도체 로켓에서 분리 (D) ->포스트 부스터가 작동되며 재돌입체 작동 준비->재돌입체와 디코이, 전파교란용 채프 배치 ->재돌입체와 채프, 디코이가 고속으로 대기권 재돌입 -> 폭발방식은 지표폭발과 공중폭발 두 가지 중 하나로 설정한다. 지표폭발: 적국의 주력 기갑사단 진격이나 해당국가의 도시와 중요시설을 한번에 초토화하기 위한 방식이라 파괴력이 크지만 핵폭발 범위가 제한적입니다. 공중 폭발: 주로 EMP에 의한 전자기 파괴와 핵폭발 후 방사능 낙진을 최대범위로 오염시키기위해 사용하며 파괴력은 다소 낮지만 폭발 범위가 넓고 기압 차에 따라 핵폭풍의 피해가 상당히 커지기도한다. SLBM은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로 잠수함 안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 입니다. SLBM의 이점으로는 추적당하지 않고 원하는 곳에서 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거의 대부분의 육지는 인공위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추적 당하지 않고 마음 것 쏠 수 있는 곳은 거의 바다말곤 존재하지 않기에 물 속에 쏘아 추적하기 어렵게 하기위해 SLBM을 개발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물 속에서 쏴야하기 떄문에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에따라 현재 SLBM 발사 방식으로는 ‘냉발사체계’ ‘열 발사’ 방식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현재 북한은 ‘냉발사 방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냉발사 방식은 미사일 발사대가 미사일의 화염에 닿지 않습니다. 즉, 냉발사체계는 미사일 발사 튜브 안의 사출장치가 미사일을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구조입니다. SLBM으로 대표적인 미사일은 ‘북극성-5ㅅ’이 있습니다. 북한은 SLBM을 만들면서 추가로 저수지에서 발사하는 SLBM도 만들었습니다. 저수지안에 플로팅 도구를 넣고 미사일을 넣어 발사하는 기술입니다. 현재 실전에 사용하는 나라는 없으며 북한은 기습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개발 중입니다. 전술핵은 우리가 생각하는 한 번 쏘면 다 날아가는 핵미사일이 아닌 군사적 요충지만 없애기 위해 만든 기술입니다. 제가 미사일이 아닌 기술이라 말한 이유는 핵 지뢰와 같이 일정 부분만 파괴하기 위해 만든 모든 무기를 일컫기 때문입니다. 전술핵 중에서도 미사일분야는 고도화된 프로그래밍이 필요합니다. 전술핵은 정밀 타격, 운용 유연성, 전장 통신 및 보안 이렇게 3개를 목표로 작동시킵니다. 자세한 것을 자료를 조사하였으나 각종 기밀문서로 잡혀있어서 더 이상의 자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현재 핵무기는 ICBM, SLBM, 전술핵으로 크게 나뉘어저 있고 각자 하는 수행이 다릅니다. 이것들은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으로 예상되며 현재까지의 평화가 한순간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면밀히 살펴봐할 것 같습니다. 문화, 예술 2518이준한 1. 기본적인 북한의 문화·예술 정책 및 이론 북한의 문화예술정책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문화에 대한 당국의 정책, 행정, 계획을 의미한다. 북한은 가문의 세습 정치를 지속하기 위해정치적 선전과 체제 강화의 도구로써 문화예술정책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김씨 일가 권력 세습을 위해 김정일은 일찍이 ‘수령형상 창조이론’을 만들어 유일사상체계가 주민들을 지배하도록 설계하였다. 여기서 유일사상체계는 수령의 혁명사상만이 유일적으로 지배하게 하고 수령의 유일적 영도 밑에 전당이 하나와 같이 움직일 것을 요구하는 수령의 사상체계이자 영도체계이다. 문화예술은 이러한 북한 체제 선전선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맡고 있다. 이처럼 북한의 문화예술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문화예술과 달리 상당히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북한은 ‘당성·인민성·계급성’과 전통문화를 사회주의 현실에 맞게 발전시키는 ‘사회주의적 민족문화’를 문화의 본질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이는 김정은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비사회주의·반사회주의 문화에 대한 척결 정책이 보다 강화되고 있다. 이는 외부 문화의 유입을 외부로부터의 문화적 침투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한류 등 자유민주주의 문화 유입을 사회주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로 규정하고, 내부적 동요를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2020년 12월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채택하여, 외부 사상, 외부문화 유입에 대한 강력한 처벌 규정을 마련하였다. 2. 북한의 문예창작의 큰 틀 북한문학을 북한노동당, 특히 최고지도자를 위한 선전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북한문단 구조상 특징을 잠간 살펴봐도 짐작할 수 있다. 외관상 북한 문학단체는 두 갈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조선작가동맹’과 ‘조선영화문학창작사’이다. ‘조선작가동맹’은 북한에서 가장 오래된 문예단체 중 하나로, 해방 직후인 1946년에 발족되었다. 당시 김일성 주도로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고 선전하는데 필요한 문학 창작을 통제하고 지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성격상 조선노동당의 문예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한국이나 미국 등 자유진영 국가 내 문인단체들과 성격이 완전히 다른 ‘정치조직’이다. 이에 따라 북한작가 들에게는 소설분과, 시분과, 희곡분과, 아동문학분과, 평론분과 등에서 자신이 속한 분과는 조 선노동당이 맡겨준 혁명초소가 된다. 군인이 상부 명령지시 없이 초소를 마음대로 옮길 수 없듯 분과이동이나 지부이동이 자유로울 수 없다. 사실, 완전히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시인이 소설가로 돌고자 하면 당이 맡겨준 혁명초소에 충실하지 못한, 마치 변절자라도 되는 듯 여겨지고 시분과에 밉보이는 동시에 소설분과도 반기지 않거니와 시를 쓰던 사람이 이제 와서 소설을 쓴들 얼마나 잘 쓰겠나 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또, 조선작가동맹은 북한 문예정책의 중심 기구로서, 체제 선전과 혁명적 사상을 고취하는 작품을 창작하고 출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세기와 더불어》, 《피바다》, 《불멸의 역사》 시리즈 같은 작품들을 출판하며, 김일성 일가의 업적을 신격화하고 체제를 지지하는 문학적 서사를 구축해왔습니다. 또한, 문예 잡지 출판, 작가 훈련, 정치적 교육 등을 통해 북한 사회의 이념적 통일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조선영화문화창작사는 북한 영화 제작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1950년대 중반에 설립되었습니다. 북한은 해방 후 체제 선전과 교육의 도구로 영화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를 위해 영화 제작을 전문적으로 감독하고 창작하는 기관이 필요했다. 조선영화문화창작사는 주로《피바다》,《조선의 별》,《한 자위단원의 운명과 같은 혁명적 서사와 주체사상을 담은 영화들을 제작하였으며, 대표적으로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다룬 영화들이 주로 제작되었다. 김정일이 영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이 창작사는 김정일의 지도를 받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화하고, 체제 선전 도구로서 영화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북한의 문학작품들이 어떻게 출판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북한에서 문학을 창작하는 모든 작가는 조선작가동맹이나 4.15문학창작단과 같은 국가 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하게 되는데, 북한의 문학 작품 출판 과정은 철저한 국가 통제와 사상 검열 아래 이루어진다. 작가들은 당의 지침에 따라 체제 선전을 위한 작품을 창작하며, 검열 및 심의를 통해 당의 이념적 목표에 맞게 조정된다. 모든 문학 작품은 출판 이후에도 철저한 사후 검열을 거치며, 주로 정치적 교육과 체제 선전에 사용된다. 3. 문화로 살펴보는 북한의 역사 해방 직후 북한은 1950년대 이후까지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문예정책을 전개했다. 이런 문예정책은 1960년대 중반 ‘모든 문예 창작을 항일혁명 문학을 중심으로 하라'는 김일성의 교시를 기점으로 변화되었다. 1980년대 북한의 문예정책에는 ‘숨은 영웅따라 배우기'운동으로 변화를 보였다. 김정일이 앞장서서 이 운동을 주도했으며, 주요인물이 항일혁명 영웅에서 기술자, 하급 당원, 간호사, 주부 등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 김정일이 다시 혁명성과 이념성을 강조하여 수령형상화의 문예정책이 다시 강조 되었다. 이는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맞서 체제를 수호하려는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는 김정일이 주체문예이론을 정립하였다. <무용예술론>, <음악예술론>, <주체문학론>등을 출판하여 주체문예이론을 체계적으로 완성했다. 현재까지도 북한의 공식 문예관이 되었다. 2000년대에는 김정일의 주체문예이론을 기본으로 하면서 ‘선군혁명문학'을 추구하였다. 북한은 2000년 말에 등장한 선군혁명문학을 “주체사실주의 문학의 새로운 발전이며, 주체사실주의가 낳은 새 형의 문학"이라고 규정하며 선군혁명문학의 특징을 “반제혁명정신의 구현, 조국애의 구현, 강렬한 견인력과 감화력"으로 하였다. 이 때문에 김정일 시대 문학예술은 선군미술, 선군영화 등으로 체계화되었다. 2000년대 중반에서는 문예정책에 ‘실리추구’와 ‘민족문화 강조’가 더해졌다. 이런 ‘민족문화 정책'의 강조는 개혁,개방에 따라 유입되는 자본주의 문화를 차단하기 위한 일환으로도 활용되었다. 4. 재미로 보는 북한 일상 문화 1. 여름휴가 여름휴가란 북한 사람들에게 낯선 개념이다. 직장인들에게는 정기휴가가 있지만 눈치보여서 쓰기 어려운 분위기 때문에 대부분 반납한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의 피서는 대부분 당일치기이다. 유명한 놀거리는 문수물놀이장이다. 27개의 미끄럼틀이 있는 큰 물놀이장으로 여름에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 서민들에게는 문수물놀이장에 가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인데, 당국에서 발급한 예비표가 있어야 하는데, 이 표를 얻으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고, 심지어 10 또는 20배 정도의 말도 안 되는 암표로 특권층과 부유층이 독점한다. 그렇기에 대부분 주변 계곡에서 피서를 즐긴다. 이때 별미인 어죽을 끓여먹기 위해 솥과 장작이 필수템이라고 한다. 사실 이것도 계곡과 가까운 사람들만 행군하듯이 들고가서 할 수 있는 일이고, 지역의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북한은 멀리 여행가려면 보위부에서 발급받은 여행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그냥 이동하다가 걸리면 강제 노역을 해야 한다. 그래서 집에서 가만히 있는게 상책인가 싶지만, 에어컨이 없을뿐더러 전기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선풍기도 틀기 어렵다. 나름의 피서는 땅굴과 지하철이다. 특히 평양 지하철은 서민들에게 지하궁전으로 불린다고 한다. 여름 별식으로는 장마당에서 사 먹는 냉면이나 까까오, 에스키모로 불리는 아이스바, 딸기와 얼음을 갈아만든 딸기 얼음물도 인기라고 한다. 2. 원하는 직업 북한은 직업 선택의 권리가 개인에게 없다. 개인의 희망보다 국가의 배치에 따라야 하는데, 능력보다는 토대와 같은 정치성이 고려된다. 이는 아직도 자유롭지 않아, 첫 직장이 평생직장이 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도 선망받는 직업들이 있다. 과거에는 국가기관 간부를 최고로 쳤지만, 연이은 숙청과 불안한 정치적 상황으로 명예도 좋지만 돈 많이 버는 직업이 최고로 여겨진다고 한다. 택시기사는 외국인을 상대로한 외화는 물론 동시에 내화까지 벌어들이기 때문에 좋은 직업으로 꼽힌다. 업무환경도 북한에선 편한 축에 속한다. 물건이 곧 재산인 판매원도 인기이다. 일반인이 얻기 어려운 물건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철도원도 인기이다. 탈 사람은 많은데 턱없이 부족한 열차 때문에 뇌물을 통해서 기차를 탈 정도라고 한다. 이 때문에 철도원 인맥이 필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북한 여성들의 로망은 평양의 상징인 교통경찰이다. 신호등이 부족한 북한에선 아직 교통경찰이 필수인데, 보통 사거리 중심에 서서 교통을 정리한다. 지방에는 남성도 흔하지만 평양에서는 여성으로만 뽑는다.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대외적 이미지를 올려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격요견은 고등학교 졸업에 165cm이상의 큰 키와 단정한 용모이다. 해외 식당 종업원은 길거리 캐스팅으로 식당 종업원을 뽑기도 한다. 이때 꼭 집안이 탄탄해야 하는데, 해외문물을 경험하고도 아무렇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식당에서 춤, 노래 등의 공연이 필수라 예체능쪽으로 재능이 있어야 한다. 다녀오면 몸짓과 말투가 세련돼져서 간부 집안과 혼사를 치를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3. 이름 북한에서는 혁명적이고 강인한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강,혁,금,철,력과 같은 글자를 즐겨 사용한다. 예를 들면 남자는 광철,혁신,철호, 여자는 련, 화, 별, 옥이 많이 쓰이고 특히 옥분, 옥순, 옥녀, 옥희, 련옥 등 옥자돌림이 많이 쓰인다. 이외에도 축복이 소금이와 같은 이름도 흔하다고 한다. 반면 옥자 경자 영자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만 금지되어 있는 이름이다. 자자돌림을 일제시대의 잔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 북한 최고 권력자들의 이름도 당연히 금지다. 따라서 원래 김정은이라는 이름이던 사람들은 개명을 해야 했다. 그렇게 600명 정도가 개명했다고 한다. 또, 자식 이름으로 나라의 충성심을 입증하기도 한다. 무려 9명의 아이를 나아 모성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은 다산왕 서향월씨는 '선군의 길에서 결사옹위의 총폭탄이 돼라'는 뜻으로 아들 다섯은 선군, 결철, 사철, 옹철, 위철, 딸 3명은 총별, 폭별, 탄별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아홉째 막내에게는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세 쌍둥이를 낳으면 국가에 보답하는 효자로 키우겠다는 의미로 세 아이의 이름을 합치면 충성동, 효성동, 총폭탄이라는 라임이 되도록 짓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첫째가 효옥, 둘째가 성옥, 셋째가 동옥이 그 예시이다. 하지만 제일 잘 알려진 이름은 대홍이와 홍단이이다. 한 산모의 부탁으로 김정일은 아이의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그때 그 지역명을 따서 아들이면 대홍, 딸이면 홍단 하라고 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들은 이미 지나간 일종의 유행이고, 최근에는 한류로 인해 한국식 이름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이를 가만히 두지 않은 것이 당연하고, 날라리풍을 바로잡겠다고 엄명을 내렸으며,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맞지 않은 이름은 출생등록 자체를 하지 못하게 했고, 출생부에 올라와 있는 이름까지 개명시켰다고 한다. 4. 헤어스타일 이발소와 미용실을 허가제로 운영하여 주민들의 머리를 규제한다. 이에 모든 미용실에는 바람직한 머리형태 도안이 걸려있다. 일종의 헤어스타일 권장 지침으로 허락된 스타일은 남성 여성 각각 십여개이다. 여자는 물결형 구슬형 제비형 등이 있고, 나이대에 따라서도 권장하는 스타일과 기장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머리카락만으로도 여자들의 결혼 유무를 대충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머리를 기를 자유조차 없어질 기미라고 하는데, 머리가 길면 지능이 낮아진다는 지침을 내린 것이다. 여성들이 미를 돋군다고 머리를 기르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머리도 나빠진다며 긴머리를 하지 말라고 강조한다고 한다. 정책 2510 성재혁 1. 문화 검열 북한을 현재 자신들의 사상에 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다양한 컨텐츠들을 차단하고 있다. 북한의 공산당 관련 체제를 비판하는 것들을 물론이고,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을 담을 수 없게 하고 있다. 이외에도 현재 북한은 해외의 문화 요소들, 특히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나 음악, 영화와 같은 것들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처벌의 수위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초기에는 적발당했을 경우 경범죄자를 수용하는 곳인 노동단련대로 보내졌던 것과는 달리 현재는 중범죄자를 수용하는 노동교화소로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더 중대한 사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북한은 이런 문화검열을 전담으로 하는 부서를 따로 두고 있다. 82연합지휘부라고 불리는 이 부서는 한류 문화를 즐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집안을 수색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들춰 보면서 검사를 한다고 한다. 정말로 한국 컨텐츠를 즐긴 것으로 확인된다면 그들을 때리고, 끌고가서 교화소에 집어넣는다고 한다. 단순 시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5~10년 정도를 갇혀있어야 한다. 과거 공개된 노동교화소의 모습 만일 관련 컨텐츠들을 유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2020년에 제정된 법률인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 따르면 많은 양의 적대국 영화나 녹화물, 편집물, 도서를 유입·유포하였거나 많은 사람에게 유포한 경우 또는 집단적으로 시청·열람하도록 조직하였거나 조장한 경우 무기노동교화형 또는 사형에 처하고, 반동적인 내용을 담은 컨텐츠를 제작하는 경우 무조건 사형이라는 상당히 강도 높은 처벌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실제로 지난 7월 북한의 대남 오물 풍선에 대한 보복으로 탈북민 단체에서 북한을 향해 보낸 풍선에 담겨져있던 한국 드라마를 돌려본 30명의 중학생들이 단체로 공개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북한과 남한의 상황이 안좋아진 상황속에서 그정도 인원이 적발당했으니 본보기의 목적으로 평소보다 훨씬 심한 수준의 처벌을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배급제? 장마당! 북한은 원래 공산주의 국가로 시작했기 때문에 원래는 주민 모두가 정부에서 다양한 물품들을 제공받는 배급제를 시행했었다.분단 이후 초반에는 배급제를 통한 원활한 공급지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공급재에 대한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다. 물론 주민의 경우 출신 성분에 따라 계층을 나눠서 차등적으로 배급을 받기는 했으나 모두가 물품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1957년 즈음 부터 매달 1일부터 15일 사이 정해진 날짜에 직장에서 본인과 부양 가족을 포함한 식량배급표를 받았다. 이를 지정된 배급소에 가지고 가서 식량 대금과 함께 지불하면 배급을 받는 형식이었다. 주택 같은 경우에도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 했으며 정부에서 각각 주택을 배정 받아서 매달 사용료를 내면서 거주하는 형식을 띄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정도 원활하게 진행되던 배급제는 1990년대 식량위기를 거치면서 붕괴되고 만다. 원래 소련에게 어느정도 지원을 받고있던 북한은 1991년 12월 26일 소련의 붕괴로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소련에게 다양한 지원을 받는 것을 감안해서 대부분의 예산을 군사 같은 분야에 투자하고 있던 북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90년대에 잇달아 가뭄과 홍수 등 다양한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 또한 어려워졌다. 저주지나 댐이 무너졌으며, 석탄을 채굴하던 광산이 침수되는 등 식량은 물론 에너지 생산에도 큰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미국 등의 자본주의 열강들이 북한을 고립시키도록 압박을 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외부로부터 부족한 물품들을 지원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식량부족으로 인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때를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부른다. 이때 이후 북한의 배급제는 아무런 힘을 못쓰게 된다. 1995년 이후에는 특정 계급을 제외하면 배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많은 북한의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필수품들을 얻기 위해 그때 당시로서는 불법이었던 장마당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마당은 실제 북한에서는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북한의 시장 하면 가장 잘 알려진 용어이기 때문에 편의상 이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장마당 하면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시장 정도로 잘못 알고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공산주의 하의 북한이라 하더라도 원래 서로 물건을 교환할 수 있는 시장은 원래부터 존재했었다. 정부에서 배급해주는 양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요를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개인들이 부업을 통해 생산한 농축산물을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 농민 시장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원래 농축산물만을 거래하던 농민시장의 목적과 달리 고난의 행군 이후 삶이 궁핍해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생필품들을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불법 시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나라의 허가를 받지 않고 민간에서 운영하는 시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마당이다. 북한측에서도 처음에는 이를 안좋게 보았지만, 계속해서 나빠지는 경제상황속에서 장마당의 규모가 계속해서 커졌다. 결국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와 2003년 3월에 종합시장 상설화를 담은 내각조치24호가 발표되면서 이러한 형식의 장마당은 종합시장으로서 국가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북한의 평양의 장마당 모습 이러한 장마당의 탄생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는 장마당 세대의 탄생이다. 장마당세대란 1980년대 이후 태어나서 제대로된 배급제를 경험하지 못하고 장마당을 통해 생계를 이어나기 시작한 세대를 일컫는다. 우리나라의 MZ세대와 시기적으로 유사하다. 이들은 원래 국가를 위하던 공산주의의 사상과는 달리 개인주의 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지도 않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외부의 문화를 접하는 등 기존의 북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주류이다. 3. 북한은 취업률 100%? 우리나라는 본인이 원하는 직업을 얻기 위해 대학에 가고, 다양한 시험 등을 통해 관련 자격을 얻는 등의 노력을 한다. 우리에게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어서 능력만 있다면 자신이 어떤 직업이든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경우는 어떨까? 북한의 헌법 제 70조에 따르면 ‘공민은 노동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노동능력이 있는 공민은 희망과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며 안정된 일자리와 노동조건을 보장받는다’ 라고 되어있다. 표면적으로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북한에서는 정부가 사람들의 직업을 배정해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직업이 아니더라도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해야한다. 만일 이에 대한 불만을 가져 직장으로 출근하지 않는다면 법적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 북한 같은 경우에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자신이 어떤 길로 갈지 선택할 수 있다. 바로 취업하고 싶다면 노동청에서 정해주는 부서로 가면 된다. 군대로 가고 싶으면 10년간 군 복무를 한 다음 탄광 같은 광산에 배치된다. 대학교를 나온 경우에도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없다. 만일 힘이나 뺵이 있는 사람이라면 좋은 자리로 가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남들이 꺼리는 곳으로 가게된다. 우리나라와 달리 대학의 메리트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북한은 취업률 100%를 지향하고 있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봉급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 공장 노동자의 월급은 약 5~10만원 정도라고 한다. 상당히 적어보이는데 이것이 지난해의 2300원 정도였던 것에 비해 훨씬 오른 것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월급이 이렇게 적은 만큼 물가도 저렴한 편이기는 하다. 쌀이 1kg당 5300원 정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정도 월급은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4인가족에 한달에 쌀을 약 10~20kg정도 먹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외식 같은 것으로 인해 쌀 소비량이 적어진 편이고, 사람이 쌀만 먹고는 살기도 힘들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처] 통일부 북한 정보 포털 KDI 한국 개발 연구원 중앙일보 북한 인권 라키비움 rfa 자유아시아방송 통일연구원 사회 문제 2523정우빈 1. 제3국 출신 탈북민의 증가 제 3국 출신 탈북민은 중국에 거주하는 탈북민이 중국에서 낳은 자녀를 말한다. 이들은 중국문화에 매우 친숙하고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이들이 한국으로 유입되면 더 많은 관심과 관리가 필요하다. 탈북과정 탈북 과정은 북한을 탈출하는 단계부터 시작된다. 탈북민들은 주로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며, 국경 경비가 삼엄해 매우 위험하다. 국경에서 체포될 경우 강제송환되어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중국에 도착한 탈북민들은 발각 위험을 피해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동남아시아 국가로 이동한다. 그러나 브로커에게 의존하는 과정에서 인신매매나 사기 등의 위험이 따른다. 제3국에 도착한 탈북민들은 한국 대사관이나 유엔난민기구(UNHCR)를 통해 망명 절차를 밟는다. 대부분은 대한민국으로 입국해 정착 지원을 받지만, 일부는 미국이나 유럽으로 망명하기도 한다. 제3국 출신 아이들이 남한에 오게된 배경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부모님이 중국으로의 동반 탈북 후, 중국에서 자녀를 출생하는 경우. 두번째, 어머니 혼자 중국으로 탈북 후 중국인 아버지와 결혼 후 자녀를 출생하는 경우이다. 첫번째 경우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적법 제4조, 부모 쌍방 혹은 일방이 중국 공민이고, 본인이 중국에서 출생하였으면, 중국 국적을 보유한다.에 의해 자녀는 중국 국적을 갖게 되지만, 두번째 경우에는 자녀의 출생신고 과정에서 불법체류 신분이 발각되기 때문에 자녀는 무국적 신분이 된다. 이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받게 되고, 남한으로 오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북한이탈주민법 제2조 1항에 따르면 “북한이탈주민”이란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 주소, 직계가족, 배우자, 직장 등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한을 벗어난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아니한 사람을 말한다. 제3국 출신 청소년들은 외국에서 태어났고, 직계가족을 북한에 두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정부는 북한이탈주민에게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지만, 제3국 출신 청소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매우적은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보호 정책도 매우 부족한 상태이다. 주요지원내용비교 탈북청소년과 제3국 출신 탈북민 자녀 주요지원내용을 비교해보면, 북한이탈주민으로 인정되는 탈북민들은 정착 기본금, 가산금, 주거지원금, 직업훈련비 및 훈련수당, 취업장려금, 미래행복통장 등을 모두 지원받는다면 최대 5000만원 이상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지만 제3국 출신 탈북민이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오직 자녀 양육가산금 450만원 뿐이다. 교육정책비교 대입과정에서 북한이탈주민으로 인정되는 청소년들은 정원외 대학 특례입학 제도가 적용된다. 그러나 제3국 출신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전형은 매우 적고, 2019년부터 특례입학 제도 대상이 되었지만, 정원'내'입학을 허용했다. 또한 북한이탈주민은 등록금면제, 사립대학 반액 보조 등의 지원을 받지만, 제3국 출신은 대학 입학금 일부 지원이 전부이다. 병역의 의무 병역법 제64조 1항 2호, 북한이탈주민은 국방의 의무가 제외된다. 에 의해 북한이탈주민은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지만, 제3국 출신 탈북민들은 자신의 고향에 총을 겨눠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군 복무기간 1년 6개월 만큼 사회진입기간이 연장된다는 문제가 있다. 2.북한 내 한류 유입 체제의 흔들림 북한 내 한류 유입은 체제 유지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한국의 드라마, 영화, 음악 등 다양한 한류 콘텐츠는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세계의 문화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며, 이는 북한이 장악한 사상 통제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한국의 발전된 사회와 경제는 북한 주민들이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 K 콘텐츠를 통해 주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외부 세계를 비교하게 되고, 이는 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 북한의 MZ와 한류 특히 젊은 세대는 한류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들은 한류를 통해 자유롭고 현대적인 삶을 동경하며, 북한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 한국의 문화와 삶의 방식은 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변화는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고, 내부 저항의 가능성을 높인다. 한류는 그들 사이에서 저항과 변화의 상징이 되고 있으며, 이는 북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북한의 노력 북한은 한류 유입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검열과 처벌을 강화하고 있다. 한류 콘텐츠를 소지하거나 유포하는 주민들은 강력한 처벌을 받을 수 있으며, 체포된 경우에는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심각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최근 북한은 한국 대중문화를 시청한 청소년들의 신상과 부모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불평등의 심화 한류의 유입은 또한 북한 사회 내 계층 간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외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간의 격차가 커지면서 사회적 긴장이 고조될 수 있다. 주로 외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이 한류 콘텐츠를 소비하게 되며, 이는 북한 사회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자료 출처] -rfa자유아시아방송 -ytn뉴스 -연합뉴스 -통일뉴스 -뉴데일리뉴스 -통일부(북한정보포털) -zum뉴스 -오마이뉴스 -유튜브 Avatar

    2024년 12월 9일 · 한둘기

  • 남북한 역사 한눈에 톺아보기[해방 후 ~ 1960년] 8.15 광복 1945년 한반도 사람들은 일제의 통치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빠져있었고, 소련군과 미국군 모두 해방군으로 여겨 반갑게 맞이해줬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38도선 이남에서는 미국이 조선 총독의 항복을 받고 군정청을 설치에 직접 통치를 선포하였다. 미군정의 직접 통치 방침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부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였고,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도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광복 직후 각지역에 자발적으로 수립된 민간 자치 기구인 인민위원회 등도 강제로 해산되거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한편 38도선 이북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앞장서서 곳곳에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소련은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고 간접 통치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거리에서 나와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 신탁 통치 반대 운동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한반도에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5년 동안 공동위원회가 한반도에 대해 신탁통치를 시행한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 신탁통치에 관해 오보를 하면서 신탁통치가 강대국들의 새로운 식민통치라는 뉘앙스로 전해졌다. 때문에 김구와 이승만 등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 세력은 신탁 통치를 식민 지배의 연장으로 간주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반탁 운동을 펼쳤다. 이에 반해 박헌영 등의 좌익 세력은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취하다가 신탁통치를 빠른 독립을 위한 지원으로 받아들여 며칠 뒤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곧 '신탁통치안 수용' 입장을 밝혔다. <동아일보가 오보한 신탁통치안> - 사실과는 다르게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 한다고 적혀있다. 미소 공동위와 좌우 합작 위원회 1946년 3월 미소 공동 위원회(제1차)가 열렸지만,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에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의 범위를 놓고 대립하였고,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휴회에 들어갔다. 여운형,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 세력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하고, 좌우 합작 운동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해 주요 정치 세력은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으며, 미소 간의 냉전 대립이 심해지는 가운데 여운형이 암살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남북이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김구와 김규식은 미군정과 우익 단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8년 4월 북한에 들어가 주요 정치 단체 지도자들과 회담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국제 연합이 남한 단독 선거를 결정한 데다, 북한 역시 내부적으로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협상은 실직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같은 해 4월 3일 좌익 세력과 제주도 일부 주민들은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무장봉기하였다(제주 4.3 사건). 정부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파견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대 내의 좌익 세력이 제주도 출동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무장봉기하였다(여수순천 10.19 사건). 이외에도 서울 등의 각지에서 좌익과 우익 단체들이 시위를 하고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등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여수⋅순천 사건> - 진압군이 부역 혐의자를 가려내기 위해 주민을 모아 놓았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부역 혐의자로 11월 1일 89명 총살됐다. 남북한의 독자적인 정부 수립 유엔 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최초의 민주적 선거인 5.10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같은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같은해 9월 9일 북쪽에서는 김일성을 필두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어져 버렸다. 그렇게 남북한은 걷잡을 숭 벗는 갈등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었다. 갈등의 결정적 단초는 북한의 지도자부터 시작되었는데, 바로 김일성이다. 김일성은 초반엔 세력이 약하였지만, 소련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 성장했고 1948년 북한의 최고 실세가 되어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고 나서 군사력을 위주로 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일성은 6.25 전쟁 전까지 군사 20만명, 탱크 242대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다. 반면 대한민국의 사정은 좋지 않았는데, 한국은 민주주의가 갓 뿌리내리기 시작할 시기였고 자연스레 여러 정당이 난립, 정치적 혼란기가 이어졌다. 이에따라 군사도 북한의 절반인 10만명밖에 키우지 못한 상태였다. <1948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앞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 각료들의 사진> -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일성, 다음이 박헌영이다. 6.25 전쟁 전쟁 발발 평화 통일은 불가능하고 남한이 군사적으로 약한 상태니 무력 통일이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한 김일성은 남한을 침략하는 계획을 세웠다. 김일성은 소련을 찾아가 남한을 침공하는 것에 대해 허락을 받으려고 갔으나, 제안을 받은 소련의 반응은 의외로 신통치 않았다. 왜냐하면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만약 북한 미국군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대한민국은 큰 문제에 직면한다. 미국이 1949년 6월 갑자기 주한미군을 철수해 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1950년 1월 '애치슨 선언'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방어를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미국은 당시 폐허가 된 유럽의 전후 복구를 지원하여 유럽에서의 자본주의의 영향력을 행세할려고 했기 때문에 많은 자본을 들였고, 이에 따라 재정이 부족해진 미국은 점령한지 얼마 안 된 일본을 더 중요하게 여겨 대한민국에서 물러났다. 미국이 애치슨 선언을 한 이후 소련은 북한의 남한 침공을 허가했고, 불과 5개월 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애치슨 라인> - 한반도는 포함이 되어있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25 당시 인민군의 남침 상황> 낙동강 방어선 전투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전선은 한달만에 낙동가 라인까지 주저앉았다. 남한의 영토는 순식간에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북한은 이제 경상도만 차지하면 남한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정말 다행인 일이 일어난다. 바로 막상 전쟁이 터지니 미국이 태도를 바꿔 한국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미국은 유엔 회원국들의 이사회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서 유엔군을 결성한 후 한반도로 빠르게 지원을 오게 되었다. 한국군은 미군이 충분히 올때까지 낙동강 방어선을 기준으로 방어를 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이 뚫리면 부산이 공격받을 수 있게 되고, 부산에는 가장 큰 항구인 부산항이 있었기 때문에 부산이 점령당하면 미국군이 상륙할 곳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뚫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었는데, 놀랍게도 유엔군과 한국군은 이 공격을 다 막아낸 것이다. <서울 시내로 들어온 북한군 전차> <다부동 전투(낙동강 방어전)> -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과 미국군이 방어선을 구축하는 사진이다. 인천상륙작전 두 달에 걸쳐서 계속 공세를 가한 북한군은 지쳐있었고, 보급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있었고, 유엔군은 충분한 숫자가 모여 전선을 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엔군 수뇌부들은 어디로 북한을 공격할지 고민에 빠졌는데, 낙동강 방어선을 그냥 뚫고 가자니 너무 많은 희생이 발생할 것 같아 상륙 작전을 개시하기로 한다. 이때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총 7만 5천명의 병력을 모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서울로 쾌속 전진하였고, 북한은 이들을 막을 병력이 부족하였다. 또한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을 듣고 유엔군과 한국군이 전선을 뚫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의 기적같은 성공으로 9월 28일 우리 군사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였다. 10월 말에는 압록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펼치고 있는 군인들> 중공군의 개입 북한을 점령하고 통일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려진 한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무너지고 만다. 당시 중공군의 숫자는 30만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을 합친 숫자의 2배나 되었다. 10월 25일 중공군은 대규모 공세을 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전선은 뒤로 밀려났다. 이후 흥남에서는 대규모 민간인이 피난을 가는 흥남철수, 1월에는 서울을 다시 뺏기는 1.4 후퇴 등 중국의 인해전술로 전선은 다시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공세로 지친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엔군의 반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탈환하게 되고 38선까지 전선을 밀고나갔다. 한편 중공군은 4차 공세 대실패로 위신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5차 공세를 명령했다. 이 공세에서 중공군 5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군인이 내려왔다. 이때 유엔군과 한국군은 엄청난 손해를 얻게 되는데, 이 공세 과정에서 발생한 유명한 전투가 바로 사창리 전투랑 현리 전투이다. 특히 현리 전투에서는 한국군 제 3군단이 병력의 60퍼센트를 잃고 군단이 아예 해체되어 버렸다. 그러나 파로호 전투 등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대승을 거두는 등 패배하지만은 않았다. 중공군은 또 한번 공세에 실패하게 되었다. <오성홍기를 들고 참전한 중공군> 고지전과 휴전 협상 중공군의 5차 공세 이후 중국과 미국은 지속된 전쟁에 지쳐갔고, 두 국가는 휴전이라는 공통된 생각을 떠올렸다. 1951년 7월 10에는 양측의 첫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유엔군과 공산군은 의견 차이로 쉽게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2년동안 협상이 지속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큰 공세는 없었지만, '고지전' 이라는 새로운 전쟁 형태가 등장했다. 양측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휴전을 맞이하기 위해 한 뼘의 고지를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때 벌어진 전투로 백마고지 전투 등이 있다. 여러차례의 고지전으로 인해 양측은 상당히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몇몇 고지들은 계속된 포격과 폭격으로 민둥산이 될 정도로 황폐화됐다. 작고 작은 전투가 이어지던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6.25 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 전쟁 피해 6.25 전쟁으로 남한과 북한은 큰 피해를 입었다. 수백만명에 달하는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전쟁중에 죽거나 실종되었으며, 이산가족은 1천만명에 달하였다. 유엔군과 중공군 또한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 전선이 38선을 기준으로 이북과 이남 전 지역을 모두 왔다갔다 했기 때문에 양측 모두 주택, 도로, 공장, 농경지 등 사회 기반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민간인의 희생도 막대하였다. 국민 보도 연맹나 인민 재판으로 양측의 민간인들은 서로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였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전후 복구와 이후의 역사 북한 전쟁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대규모로 숙청하였다. 또한 김일성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련과 중국에 원조를 요청하였으며, 생산과 소비를 국가가 통제하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확립하였다. 북한은 1956년 소련으로 부터의 경제 원조가 줄어들자 경제 건설의 재원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김일성 정부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추진할 수 밖에 없게 되었으나, 북한에는 과학이나 기술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중을 동원하여 생산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리마 운동'이다. 천리마 운동으로 북한은 제강소와 제철소 등 중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였고, 군수 산업에서 비중을 크게 두었다. 실제로 천리마 운동을 통해 시행 첫해인 1957년에만 공업은 44퍼센트나 성장하고 농업도 성장하게 되었다. 덕분에 북한의 경제 성장률은 1년에 20퍼센트에 육박하였으며, 북한의 1인당 소득은 남한보다 2배 이상 높았다. 그러나 중공업과 군수 산업 육성에 치중한 탓에 북한 주민의 생활 수준은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는 단점도 존재하였다. <천리마운동 프로파간다> 남한 전쟁이 끝난 남한 또한 북한과 마찬가지로 국토가 초토화 되어있었으며, 많은 공장과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전후 복구에 있어서 미국이 경제 원조를 통해 한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미국이 제공한 농산물은 식량 부족 문제에 도움을 주었고, 삼백산업과 같은 소비재 산업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지나치게 미국에 의존하는 바람에 경제 자립에 필요한 제조업을 발달시키지 못하였다.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숙청한 김일성과는 다르게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여러차례 헌법을 개정하였으며, 3대째 대통령을 이어나갔다. 4.19 혁명의 시작은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에서 발생하였다. 경북고, 대구고 등의 8개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승만이 있는 자유당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에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시위가 계속되던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부는 자유당의 승리를 위해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다(3.15 부정선거) 이를 계기로 마산에서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3.15 마산 의거). 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시위대에게 총탄을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15 마산 의거 당시 사진> 4월 11일, 마산 시위 때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숨졌다는 것이 보도되면서 당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또한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 이후 귀가 하던 중 폭력배들로 부터 피습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학생시위의 주체가 지방 고교생에서 서울의 대학생으로 바뀌었으며, 시위 목적도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되었다. <김주열 열사의 사진> -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모습이다. 다음날인 4월 19일, 부정선거와 여러 만행에 억눌렸던 민심이 폭발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의 대학생들은 물론 중고등학생과 시민들도 거리에 나와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외치며 시위를 진행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내리고 시위대를 향해 총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계엄령에 시위가 주춤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는 전국적으로 더 번져나갔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였고, 26일 오후 1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를 통해 하야를 선언하였다. <4.19 혁명에 참여한 시위대의 모습> 4.19 혁명 이후 외무부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한국에 최초로 수립된 민주공화국인 제1공화국은 1960년 6월 15일을 기점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8월에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지만,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정변에 의해 이 또한 막을 내리게 된다. 5월 16일 오전 8~9시 경 중앙청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가운데 박정희 소장과 오른쪽에 차지철 대위가 있다. [1960 ~ 1980년] 박정희 전대통령 집권 논란 1960년부터 1980년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한 기간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선출된 때는 시민들의 요구와 사회의 혼란으로 인해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이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윤보선이 집권할 시기인 1961년 5월 16일-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장면 정권을 실각시켰다. 이후 1961년 5월 18일에 쿠데타를 도운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을 20일에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명했다. 이로부터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그렇게 1962년 3월 22일에는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3년에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 당선되었고,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 취임을 하게 됐다.이후 재선에 성공하여 6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7차까지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당시 2번 연임이 가능했던 법을 3선 개헌을 통해 연임에 성공하게 됐다. 그럼에도 정권에 불안감을 가진 박정희는 7.4 공동 성명이 3개월 전에 일어나 냉전이 완화되는 시기였음에도 전쟁을 빌미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유신헌법이 만들어져 죽을 때까지 집권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5대부터 9대까지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업적 및 각종 사건 대부분이 알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정부 주도로 1962년부터 1996년까지 총 7차에 걸쳐 5개년 계획이 실행된 경제 발전 계획을 말한다. 박정희 정부는 경공업을 육성할 계획으로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제2차 경제개발 계획으로는 1967년에 새마을운동을 시행했고, 1972년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목적으로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되었다. 1977년에는 자력성장 목표로 제4차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됐다. 이후 1982년, 1987년, 1992년으로 총 제7차 경제사회발전 계획을 시행했다. 경부 고속도로 준공 1970년에는 경부 고속도로 준공식이 있었고, 총 수출액 10억 달러를 달성했으며, 국방과학연구소 설립과 함께 새마을 운동을 제창했다. 이때의 사회 모습이 우리가 기억하고 떠오르는 1960~80년대의 모습이다. 무허가건물 처리 몇 가지 시대상으로는 무허가건물 처리, 상수도 확충 및 정비, 보건의료 사업, 도로 확충이 있다. 당시 지방에서 인구가 유입되어 서울에 무허가건물이 대거 등장했다. 그중 달동네라 일컬었던 도심 외곽의 경사지에는 대규모 무허가건물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도시개발과 충돌을 빚게 되었는데, 이것이 선거를 앞둔 시점에는 무허가건물의 많은 인구를 의식해 호의적으로 홍보하다가 선거 이후 이를 철거하는 입장으로 선회하려던 것이 여러 번 있었다. 이런 저런 문제를 품고있던 무허가건물은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전역에 철거가 결정됐다. 주변의 목동과 상계동은 대대적으로 행해졌었다. 상수도 확충 및 정비, 보건의료 사업 당시 서울의 상수도 보급률이 60% 정도 였다. 이 때문에 우물과 같은 지하수에 의존할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했고, 동시에 인구는 증가하여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또 하수도 시설계획이 부실하였기 때문에 청계천 등의 주요 하천은 인근 무허가건물로 인해 오염돼 위생 문제가 심각했다. 그리고 매년 여름에는 홍수로 인한 침수가 반복되었고, 기존의 하수시설은 계획 없이 갖춰진 상태였다. 이에 서울은 1960년 이후 상하수도 설비확장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대대적인 계량사업과 건설이 진행됐다. 1960년대에는 설비개량확장이 두 번 시행됐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시설 확장계획에 따라 상수도의 경우 영등포와 선유 등에 새로운 정수장이 건설되는 등, 인구 증가에 맞춰 개선이 이루어졌다. 서울에는 1961년에 단 9개의 보건소가 존재했다. 당시 서울의 초등학생 결핵환자가 45%에 달할정도여서 시민들을 위한 의료 인프라 개선이 시급했다. 이에 서울에서 의료시설을 확충하였고, 연막방역소독도 활발히 했다. 이때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당시 뇌염과 콜레라를 예방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었다. 그래서 연막방역소독 외에도 거주지 주변 풀베기, 우물 및 화장실 소독, 물 끓여 마시기, 비누로 손 씻기가 강조 됐었다. 도로 확충 1960년대 들어서 도심이 과밀화되자 서울의 교통난은 큰 문제로 떠오르게 됐다. 도로는 도시의 현대화 측면에도 중요했던 터라 도로 건설은 폭발적으로 이뤄졌다. 이에 1969년에는 간선도로인 강변북로 건설이 시작되어 1972년에 개통됐다. 이외에 각종 간선도로 건설과 기존도로를 확장하는 사업도 진행했고, 서울 최초의 고가도로인 청계 고가도로를 비롯해 아현고가도로 등 각종 고가도로와 많은 지하차도가 건설되어 서울의 도로망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 강변에 무허가건물이 난립했는데, 이를 일거에 정리하고 교통난을 해소할 수 있는 판단에 보개도로도 대대적으로 건설됐다. 남북관계 1972년 7월 4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통일 관련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및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1972년 박정희의 지시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되어 김일성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제정하였다. 3대 통일 원칙의 구체적인 내용 중 첫 번째는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이고, 두 번째는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이며, 세 번째는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이다. 이후 통일논의를 통해 남북 양측이 자국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다. 북한은 남한의 ‘6·23선언’이 ‘2개 조선’을 획책하는 분열주의 노선이라며 맹비난을 했으며, 이를 빌미로 진행되어 오던 남북대화를 중단하였다. 이때 6·23선언의 내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모든 노력의 경주, 한반도의 평화유지, 남북한 간의 내정불간섭 및 불침략, 성실과 인내로 남북대화 계속, 북한의 국제기구에 참여 불반대, 남북한 UN 동시가입 불반대, 모든 국가에의 문호 개방, 평화 선린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추진 등이 담긴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이었다. 박정희 전대통령 암살 사건 1974년 8월 15일에는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 시도로 영부인 육영수 씨가 사망하였다. 1979년 10월 26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결국 사망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유신헌법으로 인한 혼란함을 해결하고자 살해했다고 한다. 북한 경제 상황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서의 북한은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원수였던 김일성이 집권할 시기이다. 이 시기에 김일성은 군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크기를 키워 위협적인 남한을 흡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를 섣불리 동시다발적으로 마구 시행했다. 그 중 국방 건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군에 막대한 투자를 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패권적 혁명전략을 세웠다. 이를 통해 1년 예산의 30%를 국방에 썼다. 또 경제도 키워야 한다 생각하여 경공업 중공업 농업 모두 투자를 크게 크게 하니 몇 년 안 가 경제에 무리가 갔다. 그 이유는 북한의 자원과 자본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김일성은 민족자립경제 노선이라는 국가 건설 노선에 대해 자존심을 부려 계속해서 경제발전을 추구했다. 이렇게 1960년 후반에 접어들어 결국 경제가 침체하였다. 그렇게, 1974년에 1973년에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 덕에 남한의 1인당 소득이 북한의 1인당 소득을 넘게 되었다. 김일성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을 중단하고 개발 노선을 변경하는 등 노력했으나 나아지지는 않았다. 결국 민족 자립 노선 같은 자존심은 버리고 1970년에 유럽에서 빌려주기 붐이 일어난 것을 이용하여 돈을 빌렸다. 때문에 1975년에 다시 역전되긴 했으나, 생산만 부추기는 김일성의 명령에 이면에는 무역 상대가 없어 적자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었다. 이로 따라 재고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석유 파동이 발생하여 여전히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 북한의 경제성장률을 보면 1950년대 중 후반 북한 경제 전체 GDP는 13.7%정도 인데, 1961~70년의 GDP는 연간 4.1%로 9.6p% 감소했다. 또, 1971~1980년의 북한 경제 전체 GDP 성장률은 연간 2.9%로 1960년대의 4.1%보다 1.2%p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1977년 북한은 1960년대 추진했던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노선'을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라는 구호로 변경했다. 북한 주민들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주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며 자신의 힘과 지혜, 나라의 자원과 설비를 최대한으로 동원해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새로운 도약을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이전 북한의 국가 건설 노선은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노선, 중공업 우선 발전 노선, 경제,국방,건설 병진 노선이 있다.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노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외세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중공업 우선 발전 노선은 경공업, 농업 보다는 중공업 발전을 우선하는 정책이며, 경제,국방,건설 병진 노선은 경제 발전과 군사력 강화를 동시에 병행한다는 노선이다. [1980~1990년도] 1980년대 초에는 김정일이 북한의 2인자가 되었다. 그때 김일성은 상당히 고령이었기 때문에 실무같은 경우에는 거의 김정일이 담당하고 있었다. 1980년대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개방을 하고 있었지만 북한 같은 경우 소극적으로 개방을 하였다. 이때 북한은 평양을 중심으로 합영, 합작사업을 유치하여 자본주의적 문화와 제도가 북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했다. 평양에 합영,합작, 위탁가공 기업 등을 설립해서 당적으로 통제하였다. 또한 이들이 북한의 경제 정책에 어긋나는 소위 말하는 자본주의적 행동을 하는 것을 전적으로 막았다. 이로 인하여 이것에 참여한 기업들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해당 정책이 실패 한 것이다. 위와 같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완전한 사회주의의 승리를 이뤄내겠다면서 모든 문제를 북한만의 방식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식량 생산이나 비료 등의 생산 같은 것들이 처음 목표했던 것들의 50%정도 밖에 하지 못하는 실패를 하게 된다. 북한의 실패 이 시기에는 북한에서 다양한 건물들을 짓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류경 호텔과 서해갑문, 순천 비날론연합기업소 등이 있다. 류경호텔 류경호텔 같은 경우 1987년에 착공되어 105층의 외관은 완성되었으나 프랑스와의 공사대금 체불과 계약 불이행으로 1990년 부터 중단되었다. 이후 2011년에 외장공사를 완료했지만 아직까지 운영되지 않고 방치되어있다. 서해갑문 서해갑문 같은 경우 대동강 하구에 위치한 북한 최대 규모의 갑문이지만, 북한의 부족한 토목 기술 때문에 완공 시한을 두차례나 연기했으며, 무리한 공사 추진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건설비용으로 40억달러 이상이 소모되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 되었으며 대동강 지역의 환경오염을 유발하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하자가 있는 사업이었다. 1981년 시작해서 1986년에 완공되었다. 원래 3년 계획이었다. 바닐론 사업 실패 순천 비날론연합기업소 같은 경우 김일성이 매년 10만톤의 비날론(나일론과 비슷한 북한에서 제작한 옷감) 생산을 위해 83년에 약 100억달러를 투자해서 만든 석탄,화학 공장이었다. 당연히 이정도 규모의 공사는 북한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고, 이것에 북한이 1984년 채권을 갚지 않겠다는 디폴트 선언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손실을 감수하고 지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운영하지 않고 방치하다 결국 2009년에는 원래 형체가 아예 남지도 않을 정도로 철거되었다. KAL기 폭파 사건,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 이외에도 북한은 한국에서 88올림픽을 여는 것에 경쟁심을 느껴서 공산측의 청년 조직등이 참가하는 행사인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약 47억 달러를 투자해서 89년에 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무리한 사업으로 인해 경제적 타격이 큰 상태에서 또 다른 추가적인 지출을 만들어 버렸기에 경제는 더이상 회복하기 힘든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80년대 경제 성장을 우리나라에게 따라 잡혀서 생긴 조급함으로 인해 일어난 일 같다. 이 시기에 북한은 이런 저런 테러활동을 저질렀다.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그를 암살 시도하기도 하였고(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 88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해 87년에 우리나라 여객기를 폭파시키기도 하였다.(KAL기 폭파 사건) [1990~2010년도] 전 세계 제네바 합의 (1994.10.21) 남북 고위급 회담 (1990.9.4-7),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1991.12.13),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992.1.20)에도 불구하고 제1차 북핵 위기 (1993.3)가 발생하며 미국이 북한 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북미간의 기본 합의문이며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룬다. 북미 양국은 북한 핵 위기를 해소하고 정치경제관계를 정상화하고 핵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위협과 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보장, 북한의 흑연감속로를 대체하는 2기의 경수로를 제공, 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로 인한 에너지 보충을 위해 연간 50만톤의 중유를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한국 및 일본과 함께 KEDO를 설립하여 협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NPT의 회원국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조약하의 「안전담보협정」 의 규정을 이행하기로 약속했다. 북한은 또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단계적 이행과 남북회담의 시행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2002년 10월, 미국은 북한이 비밀리에 우라늄 프로그램을 진행시켜 제네바 합의를 위반하였다는 사유로 중유공급을 중단시켰다. 북한도 중유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제네바 합의의 이행을 거부하고, 동결되었던 핵 프로그램을 재가동시키게 됨으로써 제 2차 북한 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제 1차 핵실험 (2006.10.9) 북한의 1차 핵실험은 함경북도 길주시 풍계리 지하 핵실험장에서 행해졌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등 전 세계 20여 곳의 지진 관측소가 폭발에 의한 충격파를 감지하여 확인되었고, 추가적인 정보 분석을 통해 핵실험의 폭발력은 5백 킬로톤에 이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보다 앞서 2006년 7월 5일 북한이 강행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인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압박 차원에서 유엔 결의를 주도했다. 북한은 이에 대해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 형식으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통과,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 등에 대한 보복으로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추가로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은 이미 핵실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대한민국 또한 미사일 이동 장면이 찍히면서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북한의 핵 실험 후 예상 외로 중국은 맹비난을 하였으며, 납치자 문제로 대립하던 일본은 더욱 강도 높은 유엔결의를 주장했다. 미국 또한 북한의 핵실험을 강력히 규탄했다. 결과적으로 대량살상무기 개발 관련 물자·장비·기술 및 자산의 거래와 이전을 방지하며, 관련 북한 인사의 입국과 경유를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호로 나타났다. 제 2차 핵실험(2009.05.25) 북한은 1차때와 동일한 장소에서 제 2차 핵실험을 진행하였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과 한미동맹을 맹비난하며 자위적 핵억제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 결의안 1718호를 복원하는 의장성명을 발표한 이후 더욱 격화되었고, 북한은 4월 14일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을 비난하는 외무성 성명에서 ‘자위적 핵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해 나갈 것’임을 밝히며 2차 핵실험을 시사하였다. 결국,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국제사회는 한 목소리로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였고 유엔 안보리는 2009년 더욱 강화된 대북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대북제재결의안 1874호를 채택하였다. 미국 정부는 유엔 제재와 별도로 대북제재 조치를 취하였고 우리 정부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한과 남한 금강산 관광 개시 (1998.11.18) 1998년 11월에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남북교류협력의 상징적 사업으로 2008년 7월까지 해상 및 육로관광 누적 인원이 196만 명에 달했다. 금강산관광지구에는 약 40여개에 이르는 남측 기업들이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였지만, 2008년 7월 남한 민간인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은 김일성의 유훈으로 시작된 사업으로 북한이 군사항인 장전항에서 온정리까지 철조망을 치면서도 금강산을 개방한 것은 경제난 해결을 위한 외화벌이 의도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관광은 ‘금강산관광 개발 및 시베리아 공동진출에 관한 의정서’(1989. 1)를 체결한 후 10여 년만인 1998년 11월 18일에 금강호가 첫 출항하면서 시작되었다. 북한은 금강산 일대를 ‘금강산관광지구’로 지정하고, 「금강산관광지구법」을 채택하여 남북경협 활성화 및 외화 수입 확대를 도모했다. 한국도 민간인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 전까지 남북교류협력의 상징적 사업이었던 금강산관광 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금강산관광 사업은 1998년에 시작되어 다소의 부침이 있긴 하였지만, 2008년 중단되기 약 10여 년간 운영되었다. 금강산관광은 1998년에 해로관광으로 시작하여 2003년에는 육로관광이 실시되었고, 2008년 3월에는 승용차관광 시대가 열리는 등 관광방식의 다변화가 진행되었다. 관광 일정도 2004년부터 당일 관광, 1박 2일 관광, 2박 3일 관광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관광코스도 초기의 구룡연, 만물상, 삼일포 등에서 해금강과 동석동~세존봉~구룡연의 순환 코스 등이 추가되었을 뿐 아니라 야영장과 해수욕장 등도 개방되었다. 2008년 7월 중순에는 비로봉 관광이, 7월 말에는 골프장 개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특히 총 18차례에 달하는 당국 간 이산가족 교류 가운데 4차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금강산에서 이루어져 이산가족 상봉의 공간을 제공하였다. 특히 금강산관광을 통한 각종 법률 정비는 4대 경협합의서와 개성공단과 여타 남북경협의 법·제도화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8년 7월 관광객 피격 사건과 관광 중단을 계기로 남북관계의 장기 경색 국면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피격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재발방지 및 신변안전보장 조치를 재개 조건으로 요구하면서 책임 있는 당국 간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북한이 이에 대해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임에 따라 재개되지 못했다. 결국 북한은 2010년 4월 금강산지구 내 남측 시설과 재산을 몰수하고 체류인원을 전원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11년 4월에는 현대아산의 독점사업권을 취소한 데 이어 5월에는 강산국제관광특구법’을 채택하여 남측의 관광 참여를 배제하였고, 2011년 11월에 중국을 통한 국제관광을 시작했다. 결론으로는, 금강산관광은 남북 간의 단순 관광을 넘어서 많은 상징적 의미와 성과를 남겼던 사업으로 평가받았지만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신변안전보장과 같은 법·제도적 장치가 미비했다. 또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해 중단 이후 북한이 취한 몰수·동결된 투자 자산과 개발 업체의 독점적 사업권 훼손에 대한 원상회복 조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연평도 포격 사건 (2010.11.23) 북한은 11월 23일 우리 영토인 연평도에 대한 포격 도발을 감행하였다. 북한은 연평도내의 군부대뿐 아니라 민가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170여 발의 포격을 자행하였고, 우리 군은 이에 k-9 자주포로 즉각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이 포격 도발로 우리 해병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민간인은 2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은 6·25 전쟁 이래 한국 영토에 대한 북한의 첫 번째 공격이라는 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를 근저에서 파괴한 중대한 도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국제사회도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미국, 영국, 일본, 독일 등 세계 각국은 북한의 비인간적인 도발 행위에 분노하고 이를 규탄하였다. 사건 경과 연평도 포격 사건 후 정부와 군당국은 연평도 포격 사건의 안보적 교훈에 주목하고 이후 북한의 추가적 도발을 막기 위한 조치에 주력해왔다. 군당국은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교전수칙을 전면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2010년 11월 28일-12월 1일간 서해 인근 우리 영해와 공해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연합훈련이 실시된 데 이어 12월 20일에는 연평도에서 사격 훈련이 실시되었다. 북한의 포격도발 이후 우리 군은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창설했으며, 병력 증강과 아울러 북한의 해안포대를 정밀 타격할 수 있는 스파이크 미사일의 배치와 같은 대응 장비를 대폭 보강했다. 북한 내부 3차 고난의 행군(북한측 발표) 고난의 행군은 1990년대 계속된 경제난과 기아를 극복하고 사회적 이탈을 막으며, 주민들의 희생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된 단어이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정신’을 강조하며 군인건설자들을 경제건설 전면에 내세웠고, 이 시기 청년들이 안변청년발전소와 원산‐금강산 철도 등을 건설하여 국가에 헌납하는 등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며 사회적 동원에 참여시켰다. 이후 고난의 행군은 북한 사회의 변화를 진단하는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다. 경제 위기로 인해 배급이 거의 중단되며, 주민들이 장마당으로 나오면서 장마당이 경제 활동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그것을 보고 자란 세대 즉, 장마당 세대의 등장을 촉진하였다. 김일성 수령 사망 1994년 7월 8일 14시 북한 1대 지도자 김일성 수령이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급성 심근경색으로인한 사망이였다. 김일성 수령은 1912년생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건립 후 6.25 전쟁,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대한민국에게 끝없는 위협을 하여 대한민국 국민 안보 위협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가 죽은 후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이 취소되고 남북관계가 경색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후계자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2010~현재] 김정은 정권의 출범 (2011-2012) 북한의 현대사는 김정은 정권의 출범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2011년 12월,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승계했다. 김정은은 그 이전까지 국내외에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버지 김정일이 사망한 후 빠르게 권력을 장악하며 새로운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김정은은 군사적 권력을 우선적으로 공고히 하여 북한 군부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병진 노선"이라 불리는 핵 개발과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진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핵무기 개발 및 국제 사회와의 갈등 (2012-2017) 김정은 집권 초기부터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2013년 2월에는 세 번째 핵실험을 감행하며 국제 사회의 제재와 비난을 받았다. 그 후에도 북한은 2016년과 2017년 연이어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특히 2017년에는 ICBM 시험 발사를 성공시키면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했다. 이로 인해 국제 사회, 특히 미국과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트럼프 행정부와 북한 간의 설전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유엔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대북 제재가 더욱 강화되었지만, 북한은 제재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군사력을 증강했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2018) 2018년은 북한 외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였다. 김정은은 그해 남한 문재인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대화 국면을 열었다. 특히,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열린 회담에서 두 정상은 한반도의 평화와 비핵화에 대한 공동 선언을 발표하며 긴장 완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북한과 미국 간의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김정은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를 논의했으나, 구체적인 합의는 도출되지 않았고, 이후에도 비핵화 협상은 여러 차례의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하노이 회담 결렬과 교착 상태 (2019)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은 기대와 달리 아무런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한 반면, 북한은 일부 제재 완화를 요구하면서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다시 미국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이며 군사적 도발을 재개했다. 북한은 또한 새로운 무기 시스템을 시험 발사하며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시사했다. 경제난과 코로나19 (2020-현재) 2020년 들어 북한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북한은 국경을 봉쇄하고 외부로부터의 유입을 철저히 차단하며 코로나19 확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중국과의 교역이 크게 감소했고, 이미 국제 제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김정은은 경제 회복을 위한 다양한 조치를 강구했으나, 외부 원조나 지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또한 김정은은 경제 계획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며, 경제 실패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프로그램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대화 재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정은의 건강 이상설과 권력 재편 2020년 김정은의 건강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북한 내부의 권력 구조에 대한 관심이 다시 집중되었다. 김정은이 몇 차례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그가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의 여동생 김여정이 실질적인 후계자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김여정은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발언과 역할을 맡으며 북한의 주요 정치 인물로 부상했다. 결과적으로 2010년 이후 북한은 김정은 체제 하에서 핵 개발을 지속하며 국제 사회와의 갈등을 이어가는 한편,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체제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남북 및 북미 관계에서는 일시적인 대화 국면이 형성되었으나, 결국 비핵화 협상의 진전 없이 다시 교착 상태로 돌아갔다. Avatar

    2024년 10월 30일 · 한둘기